![]() |
||
유치하니 어쩌니 해도 나 역시 <꽃보다남자>를 열심히 봤다.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, 그 당시 유행하던 순정만화의 남자주인공은 학생들의 ‘종이남친’이었다. 멋진 로맨스를 꿈꾸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미션-남자친구 만들기-을 수행할 자신이 없었던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순정만화를 보며 여주인공에 나를 대입시켰다. 현실에 보기 드문 멋진 외모의 남학생들이 얼굴이 화끈화끈할 유치한 대사를 내뱉는 것도 만화 속에서라면 다 용납할 수 있었다. 가난한 부모가 신분상승해보겠다고 딸을 명문고에 입학시키거나, ‘세계서열0순위’에 버금가는 남주인공들의 휘황찬란한 소개나, 말 안들었다고 붙이는 레드카드로 인해 왕따가 되는 여주인공. 말 그대로 ‘손발이 오그라드는’ 이야기에 “진짜 병맛이다!”를 외치면서도 어느새 다음 권을 읽게 된 건, 그 때문이었다.
만화를 그렇게 읽었지만 드라마나 영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이유는 또 다른 멋진 ‘종이남친’ <다정다감>을 만나서다. <꽃보다남자>만큼이나 매력적인 남자주인공들이 만족스러운 로맨스를 펼쳤지만, 스토리는 그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었다. 똑같이 고등학교가 배경이고, 상처입은 남주인공과 평범한 여주인공의 이야기였지만 ‘손발이 오그라들기’ 보다는 어딘가 저런 연인들이 진짜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줬다. 물론 살짝 겉멋들린 대사는 여전히 난무하지만,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지 고등학교때 나는 그 대사들을 다이어리에 소중하게 적어 넣고 다닐만큼 좋아했다. 연애에 대한 고민뿐 아니라 학교나 친구에 대한 문제도 군데군데 등장했고 주인공 ‘이지’보다 더 멋진 친구가 주인공의 문제를 같이 고민해주는 모습은 내게 또 하나의 로망이었다.
![]() |
||
순정만화는 맘에 차는 이야기를 만나기 참 어렵다. 그림체가 예쁜가 하면 내용이 재미없고, 내용이 재밌다 싶으면 주인공이 찌질하고, 주인공이 매력적이다 싶으면 대사가 마음에 안 든다.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 봤는데 마지막장 덮을 적이면 ‘이게 무슨 순정이냐, 판타지 혹은 액션이지 우어어어’하고 분노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. 그럼에도 다정다감은 당시 최고 인기였던 꽃보다남자를 살포시 밀어내고 내 순정만화 베스트 목록에 당당히 꼽히고 있다. 오랜 기간의 연재를 거쳐 최근 완결이 났다. 오랫동안 봐 왔던 팬에게는 살짝 실망스러운 결말일 수도 있지만 ‘다정다감’ 특유의 분위기가 유지된 점은 좋았다. 옆구리 시린 당신, ‘종이남친’이라도 상관없다면 혹은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달달한 대사로 위안을 삼고 싶다면 <다정다감>을 보시라. 어느새 가상연인을 넘어 함께 학창시절을 난 동창이 된 듯 웃고 울고 공감하고 있을테니.